수필 및 평론

전라도 천년나무

김 한 호 2019. 5. 23. 11:07

전라도 천년나무


김 한 호

 

꽃샘추위에 새순이 파르르 떨리던 날 전라도 천년나무를 찾아갔다. 문재인 대통령이 사법고시 공부를 했던 해남 대흥사를 보고, 만일암 옛터가 있는 해발 703m 가련봉을 올라갔다. 우리 일행은 두륜산의 아름다운 경치에 도취되어 너덜겅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해가 지기 전에 진도 신비의 바닷길을 보러가야 하기 때문에 가파른 산길을 숨 가쁘게 걸어갔다.

산봉우리 아래 옛 암자터에는 5층 석탑과 파손된 석등 그리고 우물터만 남아 있었다. 폐허가 된 암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높이 22m, 둘레 9.6m의 아름드리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수령이 1100년이나 되는 이 나무는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이곳에서 전라도의 역사와 애환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통일신라 이전에 전라도는 마한과 백제 땅이었다. 전라도는 노령산맥을 기준으로 북쪽인 전주, 남원을 강남도(江南道)라 하고, 남쪽인 나주, 광주, 승주를 해양도(海陽道)라고 불렀다. 고려 현종 때인 1018년에 강남도와 해양도를 합쳐 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를 따서 전라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고려시대에 행정구역을 8도로 나누면서 전라도가 제일 먼저 이름이 정해졌다. 이어서 1314년 경상도, 1356년 충청도, 1395년 강원도, 1413년 평안도, 1414년 경기도, 1417년 황해도, 1509년 함경도가 명명되었다. 전라도를 호남(湖南)이라고 하는데, 이는 금강의 옛 이름이 금호강(金湖江)으로 금호강 이남을 호남이라고 불렀다. 전라도는 1896년 노령산맥을 기준으로 남도와 북도로 나뉘었으며, 1946년 제주도가 분도되고, 1986년에는 광주가 광주광역시로 개편되었다.

전라도라고 이름을 정한 지 1000년이 되는 해인 2018년에 전라남북도와 광주광역시가 기념사업을 추진했다. 그 중 하나가 살아있는 기념물로 전라도를 대표할 천년나무를 선정하기로 했다. 전남에서 보호관리 중인 보호수 4512그루, 천연기념물 24그루, 기념물 28그루, 4103그루를 대상으로 전남대 연구진의 사전조사와 수목 전문가의 예비심사를 거쳐 최종 선발된 해남 느티나무, 강진 푸조나무, 진도 비자나무 중에서 SNS 설문조사를 통해 해남 느티나무를 전라도 천년나무로 선정했다.

이 나무는 해를 붙잡아 매어둔 나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하늘나라에서 쫓겨난 천동과 천녀가 하루만에 불상을 조성하면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래서 두륜산을 넘어가는 해를 나무에 매달아놓고 북미륵암의 마애여래 좌상과 남미륵암의 마애불 입상을 조성했다. 그러나 먼저 조각을 마친 천녀가 천동을 기다리다 해는 지고 다급해지자 밧줄을 끊고 혼자 올라가버렸다. 천녀가 양각으로 조각한 마애여래 좌상은 국보 제 308호이며, 음각인 남미륵암은 바위에 이끼가 끼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전설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이다. 더구나 1100년 된 이 느티나무는 마애불이 조성되던 시기인 850~932년 무렵에는 해를 붙들어 맬 만큼 큰 나무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는 것은 불심이나 토속 신앙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백성들의 염원이었으리라.

전라도는 햇볕이 따뜻하고 기후가 온화하여 농산수산물이 풍족하여 음식문화가 발달하고 인심이 후덕한 고장이다. 강들은 넓은 평야를 굽이돌아 바다로 흘러가듯 전라도 사람들의 성정은 자유분방하면서도 낙천적이어서 예술적인 기질이 뛰어났다.

그러나 전라도는 변방으로 곡창지대가 많아 백성들은 왜적의 침략뿐만 아니라 부패한 관리들의 수탈에 시달려왔다. 그래서 임진왜란과 일제 침략 때는 의병이 봉기하였으며, 부패한 관리의 가혹한 횡포에 항거하여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침략과 핍박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살아온 전라도 사람들은 어느 지역보다도 민중의식이 강해 외침이나 불의에 대한 저항의식이 강렬했다. 이순신 장군은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었다(若無湖南 是無國家)”고 했다. 전라도 사람들은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온 세월처럼 전라도 천년나무도 전라도 사람들의 애환과 더불어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