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매화
홍매화
김 한 호
전생에 나는 꽃을 좋아하는 선비였는지 모른다. 선비들이 좋아하는 사군자를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매화를 더욱 좋아한다. 그런데 눈 속에 핀 매화꽃을 보면, 어린 시절 고향에서 함께 살았던 매화가 생각난다.
매화는 이웃집 소녀였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얼굴이 고운 그녀를 동네사람들은 매화나무집에 산다고 하여 매화라고 불렀다. 그녀는 가난한 집안의 외동딸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면서도 구김살 없는 착한 소녀였다. 그런 소녀를 우리들은 좋아했다.
매화는 한 청년을 남 몰래 사랑하고 있었다. 그들은 달 밝은 밤이면, 달빛보다도 더 애틋한 사랑을 꽃 피웠으리라. 하지만 가난한 그녀와 부잣집 청년과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청년은 고시 공부를 한다고 산 속의 암자로 들어가버렸다.
들불같이 피던 봄꽃들이 사라지고 보릿고개가 찾아왔다. 달 밝은 밤, 초가지붕에 하얀 박꽃이 서럽게 지던 날, 매화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어디론가 가버렸다.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고향을 떠나가버렸다.
세월이 참 빠르게 흘러갔다. 그녀를 잊은 지도, 그녀의 소식을 들은 지도 참 오래 되었다.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이 오면, 내 고향 섬진강가의 매화마을에 하얀 매화꽃이 눈이 시리도록 필 때면 그녀가 생각났다. 아직도 그녀는 매화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어디에선가 살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매화의 소식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녀는 어느 절에 비구니가 되었다는 풍문이 보리깜부기같이 떠돌았다. 그 청년과 인연을 맺지 못한 그녀는 세속을 떠나 중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매화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다. 매화 어미는 그 소문을 듣고 목 놓아 울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눈 속에 핀 매화꽃 향기가 그리워진다. 더욱이 여느 해보다도 추운 겨울의 끝자락이면 매화꽃이 피는 봄이 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그 해는 남녘 어느 절에 수백 년 된 홍매화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매화꽃을 보기 위해 이른 봄에 탐매를 나섰다.
고즈넉한 절에는 매화 향기보다도 더 은은한 염불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울려퍼졌다. 이끼 낀 석탑 옆에는 고목이 된 홍매화가 숱한 세월 동안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해마다 봄이 되면 화사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수줍은 듯 붉게 핀 홍매화가 마치 매화를 닮았다. 탐방객 모두가 매화꽃을 보더니 부처님이라도 된 듯이 염화시중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웅전의 부처님께 삼배를 하고 불탑을 돌아나오는데, 매화를 닮은 여승이 걸어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 분명 매화였다.
“스님!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데, 혹시 저를 아시는지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스님은 잠시 당황하더니,
“저는 속세의 인연은 모릅니다.”
뒤돌아서서 총총히 걸어가는 여승의 모습이 늙은 홍매화 나무처럼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세월이 흐르고 또 세월이 흘러갔다. 올해는 매화꽃이 유난히도 일찍 피었다가 진다. 기후 온난화로 남녘의 날씨가 무척 따뜻해졌기 때문이다. 매화꽃이 일찍 피고 지자, 진달래, 개나리, 벚꽃들도 덩달아 피더니 한꺼번에 시들어버렸다.
봄꽃들이 떨어져버린 잔인한 4월에, 고등학교 수학여행단을 실은 세월호가 물살이 거센 맹골수로에 침몰하여 304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한 맺힌 혼백을 달래는 씻김굿의 고장 진도 앞 바다에서, 남녀 학생들이 비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처럼 꽃넋이 되어 버렸다.
이들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매화 또래의 학생들이다. 그들은 꽃다운 청춘의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꽃 같은 어린 생명들이 차디 찬 바닷물 속에서 핏빛 울음을 울부짖는 것 같아 참으로 처절하고 비통하다.
그런데 세월호 선장을 비롯하여 선원들은 침몰하는 배에서 자기만 살겠다고 먼저 탈출하고, 탑승객들에게는 배 안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더구나 해양경찰 등의 늦장 구조로 수많은 인명들이 희생당했다고 하니, 참으로 애석하고 통탄스럽다.
초파일 무렵, 혼자 조용히 바다가 보이는 절을 찾아갔다. 고등학교 교장으로서 세월호 참사로 꽃넋처럼 이승을 떠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경내에는 향 내음이 자욱하고 깊은 침묵만 흐르고 있었다. 부처님 전에 여승 한 분이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고 있었다.
불현듯 여승이 매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화가 속세의 삶을 초탈하고 구도승이 되어 부처님 앞에서 무언가를 구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염불을 하는 동안 나는 부처님을 향해 합장을 한 채, 매화의 젊은 날의 모습을 상상하며 목탁소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나 스님은 쉼 없이 염불을 하며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질 않았다. 그런데 스님의 애절한 염불소리에 나도 모르게 동화되어 스님과 내가 하나가 된 듯 부처님의 자비를 염원하고 있었다.
봄꽃들이 피고 지는 산사에서 세월호 참사로 세상을 떠난 학생들을 추모하면서 매화를 상상하게 된 연유는 무엇 때문일까? 인간의 삶은 꽃과 같은 것. 해마다 꽃은 피고 지는데 인생은 한 번밖에 피지 않는 꽃! 더구나 꽃다운 나이에 피어보지도 못한 채 떨어져버린 꽃송이처럼 바다에 꽃넋이 되어 버린 어린 학생들을 생각하니, 인생이 허허롭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