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에서 흘린 눈물
김 한 호
세월의 골짜기를 건너오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은 전쟁 트라우마였다. 이번 베트남 여행에서 일행 중 한 분이 청룡부대로 월남전에 파병되었던 칠순 노병이 있었다. 그는 49년 전인 스무 살 때 전쟁이라는 죽음의 골짜기를 건너왔다고 한다.
스무 살 청년이 겪었던 전쟁 트라우마는 평생 그리움이 되어 희미한 기억 속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아내와 사별한 후 조카를 데리고 다낭, 후에, 호이안을 여행하면서 베트콩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부대를 가보고 싶어 했다. 다행히 가이드의 배려로 해병대 사령부가 주둔했던 곳을 찾아갔다.
그 당시와 너무나 변해버린 그곳에서, 그는 어렴풋한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패망한 월남군의 유적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흔적만 남은 사령부 표지석을 기준으로 청룡부대가 저기 있었고, 멀리 바다가 보이고, 정글이 보이고, 그의 눈앞에서 죽어간 전우들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는 눈시울이 충혈 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가슴 속에 응어리진 눈물이었으리라.
그는 여행기간 내내 49년 전인 1968년의 과거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 역시 어두운 기억 저편에 머물고 있는 또 다른 슬픈 사연이 떠올랐다.
월남 파병이 한창일 무렵, 친구 누나는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별이 빛나는 밤이면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사랑의 연서를 전해달라고 나에게 부탁을 했다. 우리 동네에 살고 있었던 그 남자도 나를 통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그녀에게 전했다. 나는 그들을 위한 사랑의 우편배달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울고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군대에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가 월남으로 파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더욱 더 그를 그리워했다. 먼 이국의 전쟁터에 있는 그를 생각하며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그녀는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편지와 함께 하얀 손수건에 남십자성과 야자수를 곱게 수놓아 보내곤 했다.
월남전이 한창 치열하던 무렵, 그가 전사했다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녀는 그 소식을 듣고 미친 사람처럼 며칠 동안 울기만 했다. 두 남녀를 위해 애틋한 사랑의 연서를 전해주던 나에게도 그녀의 슬픔이 전이되는 듯 파도처럼 서러움이 밀려왔다. 별빛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길을 혼자 걸으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
세월은 깊고 푸른 강물처럼 소리 없이 흘러갔다. 그동안 무소식이 희소식만은 아니었다. 친구의 누나가 암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찾아갔다. 고운 얼굴에는 세월의 더께처럼 주름살이 얼룩져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 지나간 아름다운 날들을 그리워하는 듯 눈물만 흘릴 뿐 말이 없었다. 아직도 첫사랑을 못 잊어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영화를 통해서 월남전의 비참한 실상과 참전용사들의 처절한 전투 장면을 보았다고 한다. 영화를 보면서 첫사랑의 연인을 얼마나 그리워했으며, 그의 죽음으로 인해 얼마나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받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가슴 속에 한이 되어 트라우마가 되었으리라.
임종을 앞둔 그녀가 사랑하던 사람이 전사했다는 월남을 가보고 싶어 했다. 하얀 손수건에 남십자성과 야자수를 한 땀 한 땀 수놓으며, 사랑하는 님이 무사하기만을 빌고 또 빌었을 그 마음으로. 하지만 말기암의 몸으로 갈 수는 없었다. 대신 내가 그곳에 다녀와서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그녀를 위해 베트남을 찾아갔다. 벌써 11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전투가 치열했던 전적지를 찾아갔다. 예전에 적이었던 베트콩들은 무공훈장을 가슴에 달고 의기양양해 하며, 적화통일을 이룬 호치민을 전쟁영웅으로 떠받들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패전국인 월남을 위해 청춘을 바친 우리 젊은 영혼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베트콩이 파놓은 땅굴과 그들이 설치한 부비트랩을 보는 순간,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을 국군장병들과 그들의 사랑하는 연인들이 흘렸을 피눈물을 생각하니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으로 분단되어 1955년부터 1975년까지 월남과 월맹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한국군은 1964년부터 휴전협정이 조인된 1973년까지 31만 2853명이 참전하여 5099명이 전사하고 1만 1232명이 부상당한 쓰라린 아픔을 남긴 전쟁이었다. “자유 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라고 노래하면서, 파월장병들은 먼 이국 땅에서 피를 흘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찾아간 베트남은 이전과는 달랐다. 베트남 사람들은 과거 월남전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과거는 용서하되, 잊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희생당한 한국군과 라이 따이한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49년 전, 귀신 잡는 해병으로 참전한 노병의 팔에는 아직도 흉터가 훈장처럼 남아 있었다. 그는 포탄이 밤하늘의 별똥별처럼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레이팜탄에 화상을 입고 후송되었다고 한다. 그는 월남에서 13개월간 전투를 하는 동안 그토록 생에 대한 애착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 베트남 여행을 하면서 친구의 누님이 흘린 눈물과 노병의 핏발 서린 눈물이 오버랩 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세월의 골짜기를 건너오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리움일 것이다. 아무리 비참한 전쟁터에서도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워하고, 스무 살 아름다운 청춘을 전쟁터에서 보냈던 고희가 된 노병도 지난 일들이 그리워지는 것은, 지나간 날들은 모두 아름다운 모습으로 미화되기 때문이리라.
세월이 흐르면 과거의 은혜와 원수도 잊혀지기 마련이다. 베트남 사람들도 한류를 좋아하고, 베트남 처녀가 한국 총각과 결혼하여 다문화가정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월남전쟁을 잊어버리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마음으로 평화롭게 살아가야 한다.
언제 또다시 노병을 만나면, 월남전에서 전사한 그들이 밤하늘에 별이 되어 그리움처럼 반짝이고 있을 거라고 이야기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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