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책의 추억
김 한 호
지나간 날들은 아쉽고 그립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늙어가지만 손 때 묻은 책들이 퇴색된 채 먼지 낀 책장 속에 쌓여 있는 것을 볼 때면 책을 즐겨 읽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더욱이 청소년 시절에 지식과 교양을 길러주고 꿈을 키워주던 책에 대한 고마운 추억은 누구라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학창시절에 헌 참고서로 공부를 했다. 가난하여 새 참고서를 살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과서나 참고서 이외의 책은 구하기가 어려워 친구들이 에세이나 소설책을 읽고 있으면 통사정을 하여 빌려다가 밤새도록 읽었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옛날에는 과거시험에 합격한 양반의 책을 서로 먼저 구하려고 애를 썼다. 그만큼 헌 책은 앞사람이 공부한 방법을 뒷사람이 물려받는 지침서가 되었기 때문이다. 헌 책을 보면 앞사람의 공부 습관과 실력을 알 수 있다. 중요한 내용에 밑줄을 긋거나 어려운 문제를 풀고 표시한 것을 보면 앞사람의 성적까지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또한 헌 책은 새 책에서 느낄 수 없는 그 사람의 영혼과 체취가 묻어 있는 듯 하여 앞사람과 말 없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학년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와 참고서를 폐지로 버리고 만다. 후배들에게 물려주면 좋을 텐데, 후배들이 헌 책을 마다해서 그런지 소중한 책을 함부로 버리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그 책들은 자신의 유물이요, 그 중에는 세월이 흐르면 소중한 보물이 될지도 모른데 말이다.
지난달 광주 계림동 헌 책방 주인들과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헌 책방 토크 콘서트’를 열었다. 1960~1970년대에는 60여 곳이나 번창하던 헌 책방들이 이제는 일곱 곳만 남았는데, 그 중에서 다섯 분의 서점 주인들이 헌 책방을 운영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2대째 운영하는 서점 주인과 여든 살이 넘은 서점 주인의 이야기는 사라져가는 헌 책방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들려주는 것만 같았다.
1980년대까지는 헌 책을 사려는 사람들로 헌 책방이 붐볐다고 한다. 독학생이 검정고시 공부를 하기 위해 헌 책방을 찾았고, 고시 공부나 취직시험 준비를 위해 헌 책을 사러왔다고 한다. 이번 행사에 참석한 한 노인은 독학으로 공부를 할 때,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필기한 헌 책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서점 주인들은 가끔 책 도둑을 보고도 가난한 학생들이라 못 본 척 했다고 한다. 하긴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고 했다. 책이 귀한 시절이라 공부를 하기 위해 책을 빌려갔다가 다시 돌려주지 않거나,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슬쩍 가져가는 책 도둑을 너그럽게 봐 주던 시절이었다.
고백컨대, 나도 대학시절에 꼭 사보고 싶은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을 살 수가 없어 대학도서관에서 슬쩍 가져온 적이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책들을 수차례에 걸쳐 도서관에 기증하거나 버리기도 했다. 그 중에는 진귀한 책도 있었고 값비싼 책도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그 책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그 책에 대한 애착이 컸기 때문이리라. 이왕 내 책장에 꽂혀 있으니 부끄러운 유물이지만 오래도록 보관해야겠다.
전자책 시대가 되면서 종이책은 언젠가 귀중한 유물이 될 것이다. 책도 오랜 세월이 지나면 《삼국사기》, 《삼국유사》, 《훈민정음》, 《징비록》, 《동의보감》 등과 같은 고서적이 ‘국보’로 지정되고, 김소월의 《진달래꽃》처럼 ‘근대문화유산’이 된다. 그러므로 헌 책이라고 함부로 버리지 말고 그 중에서 가치 있는 책은 잘 보관해야 될 것이다. 나는 유명작가가 서명해준 책이나 내 작품이 실린 책과 중ㆍ고등학교에서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쳤던 국어와 문학 책을 보물처럼 보관하고 있다. 그것은 먼 훗날 나의 유물이 될 테니까 말이다.
'수필 및 평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수유꽃 피는 사연 (0) | 2019.04.30 |
---|---|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0) | 2019.02.17 |
방관자가 많은 사회 (0) | 2019.02.17 |
눈 내리는 날의 소확행 (0) | 2019.01.19 |
그냥 한번 웃어보자 (0) | 2018.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