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및 평론

라일락꽃 피던 교정

김 한 호 2023. 5. 7. 16:20

라일락꽃 피던 교정

 

김 한 호

 

라일락은 첫사랑의 꽃이다. 라일락의 꽃말이 첫사랑이듯 나에게 이라는 말은 가슴 설레며 잊히지 않는 추억이다. 교직에 처음으로 발령을 받은 남녀공학 고등학교에는 봄날 이맘때쯤이면 라일락꽃 향기가 교정에 흩날렸다. 초임 학교에서 나는 풋풋한 학생들과 함께 젊은 날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우리들은 윤형주의 노래 우리들의 이야기를 즐겨 불렀다. “웃음 짓는 커다란 두 눈동자 긴 머리에 말 없는 웃음이 라일락꽃 향기 흩날리는 교정에서 우리는 만났소.” 나는 육군 대위 때, 라일락꽃 피던 교정에서 만난 첫사랑의 여대생이 시골학교 선생님일 때 결혼을 했다. 그런데 또 라일락꽃이 화사하게 핀 교정에서 청순한 여고생들과 만났다. 그 소녀들은 나를 총각선생님인 줄 알고 날마다 책상 위에 꽃을 갖다 놓았다.

 

세월은 말없이 흘러, 이곳저곳 몇 학교를 옮겨 다니다 교장으로 정년퇴직했다. 퇴직 후 새로 지은 무등산아이파크로 이사 와서 꽃과 나무를 가꾸고 있다. 우리 아파트는 두 번이나 조경상을 받을 만큼 정원이 아름답다. 며칠 전 아파트 화단에 한 무더기 나무속에 라일락꽃이 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종류가 다른 나무들 속에 작은 라일락이 휩쓸려 심어져 있었다. 우리 학생들처럼 제각기 빛깔과 모양이 다른 꽃들과 어울려 피어 있었다.

 

라일락을 옮겨 심으면서 불현 듯 라일락꽃을 좋아하던 첫 학교의 제자들이 생각났다. 그 학생들은 공부를 잘 하거나 졸업 후 잘 사는 제자가 아니라 세상을 원망하며 자살했거나 불행하게 사는 제자들이다. 불우한 환경에서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그들이 불쌍하여 흙 묻은 손으로 눈물을 닦으니 얼굴이 흙투성이가 돼버렸다.

 

첫 학교에서 전근하여 완도 외딴섬에 근무할 때였다. 주말에 태풍주의보가 내려 뱃길이 끊겨 육지로 갈 수가 없었다. 광주에 있는 어린 외아들이 아파서 꼭 가야만 했다. 부득이 주민들과 선생님 몇 분이 선외기를 타고 목숨을 걸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를 건넜다.

 

완도 버스터미널에서 온몸이 비에 젖은 채 앉아 있는데, 고속버스 안내양이 큰소리로 선생님!” 하며 다가왔다. 국어선생님을 좋아했던 그녀는 일부로 숙제를 하지 않아 벌을 받던 말괄량이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차표 몇 장을 건네주고는 빨리 차를 타야 한다면서 뛰어가버렸다.

 

첫 학교에서 담임을 맡았던 제자들이 반창회를 한다고 초청했다. 그 모임에 반에서 꼴찌를 했던 제자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그가 가까이 다가와서 선생님, 제가 꼴찌를 했지만 개근상을 받은 건 알고 있지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른 친구들은 컨닝을 했는데 저는 한 번도 하지 않아서 그래요.” 공부는 못했지만 정직하고 성실한 제자가 마흔이 넘도록 장가를 못 갔다고 한다.

 

제자들과 헤어져 집에 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인생은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났는가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타고난 유전적 차이가 불평등의 원인이 되는 세상에 흙수저로 태어나서 힘들게 살아가는 제자들이 안타깝기만 했다. 나는 평교사로 교직생활을 할 때는 낙도와 시골학교에서 담임을 했다. 장학사와 교감, 교장일 때는 담임은 아니었지만 어릴 적 꿈이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가난하고 불쌍한 학생들을 도와주었다.

 

해마다 봄이 되면 교정에는 라일락꽃 향기가 흩날린다. 라일락꽃은 우리 아이들처럼 애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원산지인 라일락의 원래 이름은 수수꽃다리였다. 1947년 미국 군정청 식물 채집가가 도봉산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던 나무의 종자를 미국으로 가져가 개량해서 미스김 라일락이라고 이름을 붙여 역수입했다.

 

라일락이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오듯이, 우리 아이들 중에는 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다시 친부모를 찾으러 한국에 오는 입양아도 있다.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입양의 날, 성년의 날, 스승의 날이 있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라일락꽃 향기 흩날리는 교정에서 우리 학생들이 해말갛게 웃으며 사랑받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세상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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