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및 평론

백비의 묵언

김 한 호 2023. 6. 29. 22:20

백비의 묵언

 

김 한 호

 

지난달 ROTC 14기 총동기회의 충청지역 문화탐방에 부부가 참여했다. 하루 일정으로 청남대, 계룡대, 대전 현충원을 탐방했다. 현충원의 호국영령들의 묘비에는 이름과 생몰연대, 업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우리들은 625전쟁 영웅 백선엽 대장과 이등병에서 장군이 된 우리 동기의 아버지 최갑석 소장의 장군묘를 참배했다.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다음날 진천에 사는 고향 친구를 만나서 고려시대 때 축조된 농다리와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는 보탑사를 찾아갔다. 보탑사에는 아무 글씨도 새겨져 있지 않은 백비(白碑)가 서 있었다. 보물 404호인 진천 연곡리 석비는 고려시대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3.6m의 용첩비로 받침은 거북 모양이며 비머리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려고 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비문이 없으면서 전해오는 이야기도 알 수 없다.

 

보탑사는 비구니 사찰이다. 고려 초기에 지은 절인데 폐사가 되어 백비만 남아 있다가 1996년에 비구니 스님 세 분의 발원으로 창건했다. 보탑사가 있는 보련산 자락은 연꽃 모양으로 연꽃의 중심부에 황룡사 9층 목탑의 전통 방식과 못을 사용하지 않고 52.7m3층 목탑을 세웠다.

 

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안치되어 있는 일종의 무덤 건축물이다. 대부분 석탑이 많지만 목탑으로는 보은 법주사 팔상전, 화순 쌍봉사가 있다. 보물인 쌍봉사는 화재로 소실되어 새로 지었다. 보탑사 이전에 고려시대 때 지은 건물은 숱한 전란으로 소실되고 마멸된 백비만 남았으리라.

 

백비로 유명한 비석은 중국 시안에 있는 당나라 고종과 측천무후가 함께 묻힌 건릉이 있다. 고종의 황후였던 측천무후는 황제인 아들들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무주의 여황제가 되어 폭정을 한 중국의 3대 악녀이다. 그녀는 유언으로 묘비에 한 자도 새기지 말라고 하여 무자비(無字碑)를 세웠다.

 

또 백비는 중국 베이징에 있는 명나라 13명의 임금이 묻혀 있는 명13릉 중 만력제의 신공성덕비가 있다. 만력제가 비석을 세워서 자신의 공적을 기록하라고 했지만 망국의 군주라 하여 무자비로 남겨 두었다. 부끄러운 역사를 후세에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에는 박수량의 백비가 장성에 있다. 박수량(1491~1554)은 조선시대에 판서를 지냈지만 청빈한 삶으로 조선시대 청백리 217명에 선정되었다. 감사원에서는 황희, 맹사성, 박수량을 대표적 청백리로 선정했다. 박수량은 내가 죽거든 시호도 정하지 말고, 묘비도 세우지 말라고 유언했다. 그런데 명종이 백비를 세우게 했으며, 후손들이 시호를 건의하여 순조 때 정혜(貞惠)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최근에는 백비 옆에 큰 비석을 세웠다. 청백리 조상의 유언을 무시한 후손들이 어리석을 따름이다.

 

누구나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한다. 이름을 남기지 않은 보탑사 백비를 보면서 할 말이 없었다. 침묵이 아닌 묵언이었다. 침묵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지만, 묵언(默言)은 할 말이 없는 무()와 공()의 경지이다. 보탑사 여승들이 여자의 몸으로 속세를 떠나 산중에서 불도에 전념하는 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무나 많은 말을 한다. 그 말이 상대방의 마음밭에 씨가 되어 영혼을 흔든다. 고운 말은 아름다운 꽃이 되지만 상처를 주는 말은 불씨가 된다. 그러므로 묵언만큼 소중한 수행은 없다. 고려시대 수도승들은 묵언으로 불도에 정진하여 해탈하고 백비에 아홉 마리 용이 되어 보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비석에 무슨 말을 새기겠는가.

 

ㆍ문학박사, 수필가, 문학평론가

ㆍ육군 대위 전역(ROTC 14), 전 고등학교 교장(홍조 근정훈장)

ㆍ저서 : 한국현대수필작가 대표작선집 하늘 메아리10, 21세기 한국교육 희망을 말하다(공저), 2021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최우수도서

ㆍ수상 : 세종문학상, 수필문학상, 공무원문학상, 전남문학상, 광주문학상, 국제PEN광주문학상, 올해의 작품상(광주문협), 아시아서석문학상 대상

'수필 및 평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나무꽃  (0) 2023.07.30
하늘빛이 서러워  (0) 2023.07.04
잡초가 된 민들레  (0) 2023.06.18
사각지대 사람들  (1) 2023.06.01
라일락꽃 피던 교정  (0) 2023.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