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은행나무
김 한 호
광주에는 은행나무 가로수길이 많이 있다.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때 광주 시내의 가로수는 온통 은행나무로 도시가 은행나무숲으로 에워싸인 듯했다. 그 중에서도 옛 전남도청 주위에는 아름드리 큰 은행나무가 있었다. 나는 봄이면 연둣빛 이파리가 싱그럽게 피어나고,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도청 앞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좋아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은행나무들이 사라져버려 안타까울 뿐이다.
옛 전남도청 앞 분수대는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광주시민들이 궐기하던 곳이다. 그 역사의 현장에 남아 시민군이 스피커를 달았던 200여 년 된 회화나무마저도 2012년 여름 덴빈ㆍ볼라벤ㆍ산바 태풍으로 뿌리째 뽑혀 고사하고 말았다. 그래서 도청 앞에는 518을 기억할만한 나무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다만 금남로의 은행나무 가로수들만이 518의 슬픈 사연을 간직한 채 광주시민들과 애환을 함께하며 살아가고 있다.
광주의 은행나무는 광주 시민들이 민주화 투쟁을 하던 거리에 남아있는 역사적인 증거물이다. 그 나무들은 518 때 도청 앞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나무에 총탄이 박혀도 살아남았고, 군중시위 때는 최루탄의 독한 가스와 화염병의 거센 불길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518과 생사를 같이 했던 나무들이다.
그래서 은행나무는 전라도 사람들을 닮았다. 은행나무는 화재를 당하면 타 죽기는커녕 오히려 껍질에서 물을 뿜어내 스스로 불을 끈다. 은행나무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질 때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유일한 나무이다. 이처럼 은행나무가 여러 악조건을 견디며 천 년이 넘도록 장수하는 비결은 자기 방어력에 있다고 한다. 마치 전라도 사람들의 억세고 끈질긴 저항정신처럼 말이다.
518광주민중항쟁은 전라도 사람들이 불의에 저항한 여러 사건 중 역사적으로 계승된 일련의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의 봉기, 부패한 사회에 대한 반기로서 동학농민운동, 일제의 침략에 항거한 광주학생독립운동, 그리고 민주화 과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역사적인 사건 중의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소외당하고 핍박받으며 살아온 전라도 사람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집단 무의식의 민중정서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는 변방지역에서 오랫동안 차별당하며 살아온 이 지역 사람들은 어느 지역보다도 민중의식이 강해 외침이나 불의에 대한 저항의식이 강렬했다. 이러한 전라도 사람들의 지역 정서가 마침내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민중항쟁으로 되살아났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전라도 사람들은 은행나무처럼 질기고 억세게 살아왔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식물들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본래의 형태와 다르게 진화해왔다. 그렇지만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가는 것은 은행나무와 도롱뇽, 바퀴벌레밖에 없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3억 5천만 년 전 고생대 때 지구상에 나타나 7천만 년 전 백악기 말엽까지 세계 곳곳에 여러 종이 퍼져 살았으나 빙하기 때 다 얼어 죽고 오직 한 종만이 살아남아 1과, 1속, 1종으로 한국, 중국, 일본에만 살고 있다.
은행나무가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열매에서 나는 독특한 냄새로 자기를 방어하는 저항력이 있기 때문에 번식하고 생존할 수 있었다. 이는 불의에 저항하며 투철한 역사인식을 가진 전라도 사람들이 천 년을 한결같이 살아가는 은행나무의 속성과 닮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금남로 은행나무는 광주시민들의 저항정신을 표상하는 기념물인 것이다.
그런데 광주시민들과 애환을 함께한 은행나무 가로수들이 수난을 겪고 있다. 각종 공사와 관리 소홀로 은행나무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가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비록 518이라는 아픔의 생채기가 남아있는 광주이지만 은행나무만이라도 건강한 생명체로 존재하여 광주시민들과 함께 영원히 살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광주시의 나무(市木)인 은행나무를 518 광주민중항쟁과 관계맺기를 하여 기념물로 지정하고 스토리텔링도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해마다 5월이 오면, 민주화의 성지 광주에 은행나무 새싹이 피어나듯이 민주주의를 위해 항거한 고귀한 희생정신이 되살아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숱한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면서 멸종하지 않고 지구상에 살아남은 은행나무처럼 불의와 외침에 저항하며 살아가는 전라도 사람들의 민중의식이 은행나무와 함께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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