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및 평론

목화꽃 피는 계절

김 한 호 2017. 3. 16. 15:15

목화꽃 피는 계절

김 한 호

해가 중천에 떠서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날도 어머니는 목화밭에서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학교가 파한 뒤 나는 찢어진 검정 고무신을 끌고 산비탈 목화밭으로 달려갔다. 우리 집에 가봤자 아무도 없는 빈 집에 먹을거리라곤 꽁보리밥밖에 없으니, 어머니가 있는 산자락 목화밭으로 갔다.

6.25 전쟁 중에 태어난 나는, 못 먹고 자라 얼굴에 마른버짐이 피어 있었다. 어머니는 마른버짐이 목화꽃처럼 핀 내 얼굴에 땀을 닦아주면서 빙그레 웃으며 목화 다래를 한웅큼 건네주었다. 보릿고개 때 며칠 굶은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다래를 깨물어 그 속에 보늬를 파먹었다. 다래의 달착지근한 맛이 온 몸에 퍼지자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팝콘처럼 부풀어진 미영(목화)을 목화꽃 같은 노을이 질 때까지 땄다.

목화는 탐스럽게 하얀 꽃이 피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을처럼 붉은 색으로 변한다. 꽃이 지고나면 몽우리가 생기고 초록색을 띤 달걀 모양의 밤톨만한 다래가 맺힌다. 다래는 맛이 달콤하여 먹을거리가 없던 시절에 우리들은 어른들 몰래 다래 서리를 했다. 다래 서리를 할 때는 맛이 좋은 다래를 고르기 위해 목화송이를 잔뜩 따버려 목화밭을 망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들이 다래를 따 먹으면 목화솜처럼 눈썹이 하얘지거나 눈썹이 빠진 문둥이가 잡아먹는다고 말했다.

나는 다래가 먹고 싶을 때는 어머니가 있는 목화밭으로 달려갔다, 목화밭에 가면 그냥 기분이 좋았다.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목화솜이 따뜻하게 느껴져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긴 목화꽃의 꽃말이 어머니의 사랑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하얀 옷을 즐겨 입어 백의민족이라 일컬었다. 목화는 고려 공민왕 때(1363) 문익점(1331~1400)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면서 붓 대롱에 목화씨를 숨겨 가지고 왔다. 그 후 목화를 전국적으로 재배하여 무명옷을 입게 되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는 삼백(三百)이라 하여 쌀, 소금과 더불어 목화 공출이 극심했다. 특히 태평양전쟁 때는 군수품 조달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목화 재배를 장려하기도 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8월이면 산자락이 목화밭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분홍빛 목화꽃이 질 무렵이면 백의민족의 한 서린 역사가 생각난다. 1910829일은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었고, 1945815일은 광복 투쟁으로 나라를 되찾았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목화꽃이 피는 8월이 되면, 일제 식민지시대의 참담한 기억을 이야기하곤 한다. 언젠가 시집간 누님이 아버님 제사 때 목화밭의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태평양전쟁으로 식민지 백성들에게 군량미 공출을 강요하며, 집집마다 감춰둔 곡식을 찾아내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우리 민족은 일제의 탄압으로 식량을 빼앗기고 쑥이나 송피를 넣어 멀건 죽을 끊여 먹거나 초근목피로 생계를 연명했다.

우리집은 일제의 침략으로 논밭을 빼앗겼다. 식구들이 많아 먹고 살기도 어려운 형편인 데 논밭마저 없으니 살길이 막막했다. 더구나 부모님은 여섯 아이를 낳아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여 병이 들어 네 아이를 하늘나라에 보내고 말았다.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데 그 슬픔은 오죽했겠는가? 그래서 아버지는 자식들이 굶지 않도록 온갖 궂은 일을 다했다.

아버지는 산비탈 목화밭에 땅굴을 파고 곡식을 숨겨두었다. 그리고는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말려둔 미영대(목화 줄기) 속에 몰래 곡식을 숨겨오곤 했다. 그날도 아버지는 새벽녘에 목화밭으로 갔다. 그러나 아침 해가 떠올라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가족들이 아침을 굶었다. 누님은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고 학교에 갔다.

그날은 밤새 함박눈이 내려 산자락이 눈으로 하얗게 뒤덮였다. 아버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동학혁명 때 할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눈 덮인 산자락을 돌아 살얼음이 언 냇물을 맨발로 건너 산비탈 땅굴에서 곡식을 가져오느라 늦었던 것이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일제의 잔혹한 수탈을 견뎌내고 마침내 해방을 맞이했다.

지금은 8월이 되어도 목화밭이 없어 목화꽃을 볼 수가 없다. 목화꽃이 없으니 달콤한 다래도 먹을 수 없고, 부드러운 목화솜도 만질 수 없어 아쉽다. 하지만 목화꽃이 없어도 일제강점기 때처럼 고통스러운 일들이 없으니 행복한 세상이다. 더욱이 해방이 된 이후에 형님과 내가 태어나고 여동생도 있어 우리 5남매는 지금까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하얀 무명옷을 즐겨 입던 아버지, 어머니도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되었다. 우리 형제들도 어느덧 초로의 나이가 되어 목화꽃 피던 계절을 잊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일제가 남긴 우리 가족의 상흔은 구전되어 손자들에게까지 전해질 것이다. 역사는 지울 수 없는 과거의 흔적으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잘못된 역사는 후세에 반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목화꽃 피는 계절이 오면 목화꽃을 보러 가야겠다. 그리고 어린 시절 맛있게 먹던 다래를 아이들과 함께 따 먹고 싶다. 다만 식민지 백성들이 피땀 흘려 따던 목화송이가 아닌 선진국의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 목화꽃을 보고싶다. 그 꽃이 백의민족을 지켜온 자랑스러운 역사였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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