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및 평론

백범 김구와 백화마을

김 한 호 2019. 8. 31. 16:18

백범 김구와 백화마을

김 한 호

 

무등산 증심사 가는 길목에 배 고픈 다리가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홍림교가 새로 건설되었지만, 예전에는 다리 가운데가 배 고픈 모습처럼 푹 꺼져 배 고픈 다리라고 불렀다. 이 다리는 궁핍한 시대에 살았던 조상들의 애환이 서린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더구나 배 고픈 다리는 19805.18 민중항쟁 때 광주 시민들이 계엄군을 방어하기 위한 저지선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처럼 광주에는 민중들의 삶과 함께 했던 역사적인 지형지물들이 많이 있었으나 재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 중의 하나가 백화마을이다. 백화마을은 홍림교에서 광주천의 물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뽕뽕 다리라고 구멍 뚫린 철판으로 만든 다리가 있었다. 지금은 뽕뽕 다리가 철거되고 새로 방림교라는 다리를 건설했는데, 그 부근에 옛 백화마을 터가 있다.

백화마을 근처에는 욱일승천기를 본떠 공동우물을 중심으로 방사선 형태로 여덟 개의 골목이 있는 학동 팔거리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20~1930년대는 일제침략자들의 수탈로 도시 빈민들이 광주천 하천부지에 토막집을 짓고 가난하게 살았다. 1930년대 일제는 이들 중 이상촌이라 하여 빈민들에게 갱생부락을 만들어 강제 노역과 감시를 위해 집단 거주지를 만들었다.

그런데 1945년 해방이 되면서 1948년까지 해외에서 국내로 들어온 귀환자들이 122만 명이나 되었다. 일본에서 112만 명, 중국에서 7만 명, 필리핀과 남태평양 등에서 1만여 명이 귀국했다. 광주도 광주읍에서 광주부로 승격된 1935년에 5만 명이던 인구가 해방 무렵에는 8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들 중에는 독립운동가도 있었으나 대부분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에 징병ㆍ징용ㆍ위안부로 끌려갔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생계가 막막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김구 선생은 후원금으로 전쟁 이재민들이 살 수 있는 해방촌을 만들게 되었다.

김구 선생은 1896년 치하포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다 탈출하여 광주, 보성, 해남 등지에서 도피생활을 했다. 그는 1945년 해방이 되자 27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와 이듬해 9월에 도피생활을 했던 지방을 순회했다. 그 후에도 광주를 비롯하여 전남지방을 순회했는데, 가는 곳마다 환영 인파와 함께 후원금품을 많이 내놓았다. 김구 선생은 이 후원금품을 당시 서민호 광주시장에게 주면서 전쟁 이재민들을 돕는데 써달라고 하여 전재민촌(戰災民村)인 백화마을을 조성하게 되었다.

백화(百和)마을백 가구가 화목하게 살아라는 의미로 김구 선생이 이름을 지어주었다. 1946년 공사를 시작하여 1947년 겨울에 학동 광주천변에 백화마을이 만들어져 100가구 400여 명이 입주를 했다. 집들은 4평 남짓 크기의 방 한 칸, 부엌 한 칸으로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했다. 백화마을은 군대 막사처럼 길쭉한 목조건물로 한 지붕 아래 여섯 가구가 마치 마구간처럼 나란히 이어져 있어 말집이라 불렀다.

이처럼 주거환경이 좋지 않아 장기 거주한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백화마을은 1992년에 백화아파트가 들어서고, 학동 팔거리는 2011년에 휴먼시아 2단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학동 1013번지 일대는 역사공원으로 2015년에 광주백범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백범기념관에는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을 했던 많은 자료들이 있어 김구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교육장이 되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은 조국의 자주독립과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의 지도자이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라는 백범일지(보물 1245)가 생각난다. 하지만 광복된 나라에서 아직도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왜곡된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부끄럽기만 하다.

백화마을 옛 터를 바라보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애국지사들이 백화마을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불쌍하게 살았을 모습을 상상하니 애처로웠다. 더욱이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올해에 백범기념관에서 나라 잃은 민족이 일제의 만행에 고통당했을 그 당시 전시 자료들을 보면서,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남북으로 갈라진 대한민국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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