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꽃이 필 때면
김 한 호
꽃샘바람이 불면 봄꽃들이 온 산야에 들불처럼 피어난다. ‘봄’이 ‘보다’에서 나왔듯이,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고 피는 봄꽃들은 저마다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온 산하를 연분홍빛으로 물들이는 진달래꽃은 우리 겨레의 정서와 어울리는 한국적인 꽃이다.
진달래꽃은 예로부터 우리 겨레와 친근한 꽃이었다. 진달래꽃은 신라 향가인 <헌화가>와 고려가요인 <동동> 조선시대의 가사인 <상춘곡>에도 나온다. 또한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어 왔다. 그만큼 진달래꽃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자생하는 꽃으로 우리 겨레와 희비애환을 함께 한 한국 여인 같은 꽃이다.
진달래꽃을 보면, 마치 봄처녀같이 수줍음이 많은 꽃이며, 시집간 새색시처럼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꽃이다. 아니면 시집 살던 며느리가 친정에 다녀올 때, 녹의홍상(綠衣紅裳) 차려입고 바우고개 울며 넘던 서러운 여인 같은 꽃이다. 그 꽃은 우리 민요에 “성님 성님 사촌 형님 시집살이 어떻든가 / 고초 당초 맵다한들 시집살이 당할소냐 / 열두 폭 다홍치마 눈물 받다 다 썩었네”라고, 시집살이 속내를 드러내는 한 맺힌 꽃이다.
진달래꽃은 아시아가 원산지이며, 꽃말은 ‘사랑의 즐거움’이다. 한국에서 진달래꽃 전설로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가 있다. 하늘나라 선녀가 나무꾼과 결혼하여 예쁜 딸을 낳아 ‘진달래’라고 불렀다. 새로 부임한 사또는 진달래를 첩으로 삼고자 했으나 거절하자 죽여버렸다. 나무꾼은 딸을 부둥켜안고 울다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그런데 진달래와 나무꾼의 시체는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에는 핏빛 꽃이 피어났다.
꽃에는 전설이 있고, 나라마다 나라꽃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나라꽃인 무궁화를 두고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진달래꽃을 피우고 있다. 한이 많은 민족이라서 그런 것일까? 왠지 진달래꽃을 보면, 6ㆍ25전쟁 때 포연이 자욱한 고지에서 죽어간 젊은이들의 혼백이 꽃넋이 되었다는 사연 때문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꽃이 되고 말았다.
어릴 적 고향마을에 함께 살던 이웃집 누나는 6ㆍ25전쟁 때 부모를 잃고, 먼 친척이 사는 낯선 도시로 식모살이를 떠났다. 그녀는 어린 우리들에게 진달래꽃을 한 움큼씩 나눠주고 울면서 고향을 떠나갔다. 진달래꽃이 피는 봄이면, 뒷산에서 소쩍새가 “솥 적다. 솥 적다” 우는 소리가 배고파 우는 누님의 하소연처럼 들렸다.
6ㆍ25전쟁 중에 태어난 우리들은 진달래꽃이 피는 봄이면,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혓바닥이 보랏빛이 되도록 참꽃을 따먹던 추억이 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다니지 못한 까까머리 소년은 진달래꽃이 핀 산에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다니며 학교에 다니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 소망은 이루어졌으나 중ㆍ고등학교 때 부모님을 여의고, 대학은 가정교사를 하며 장학금을 받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진달래꽃’을 노래한 <김소월 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진달래꽃이 화사하게 핀 화창한 봄에 꽃잎처럼 가녀린 처녀를 대학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는 진달래꽃이 피던 봄날 ROTC 축제 때 파트너가 된 후, 7년 동안의 긴 기다림 끝에 아내가 되었다. 그 꽃은 공수특전사 훈련 때는 하늘에 낙하산이 되어 피어 있었고, 휴전선 백마고지에는 그리움처럼 피어 있었다.
몇 년 전에 그토록 다니고 싶던 학교를 평생 다니다가 진달래꽃 빛깔의 홍조 근정훈장을 받고 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했다. 아내도 그러께 여름에 황조 근정훈장을 받고 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했다. 정년퇴직을 하던 해에 지리산 둘레길 2구간인 흥부골 휴양림에 문학비를 세웠다. 문학비가 있는 뒷산에는 문학의 꿈이 피어나듯이 봄이면 진달래꽃이 활짝 피어난다.
나에게 진달래꽃은 봄을 알려주는 꽃이라기보다는 삶의 희망을 알려주던 꽃이었다. 그래서 진달래꽃이 필 때면, 불현듯 아련한 옛 추억이 그리워진다. 이제 봄이 오면 두 돌이 되는 손녀와 함께 아름답던 동심의 세계가 머물러 있는 희망의 꽃동산으로 가야겠다. 손녀 ‘봄’이가 아내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꽃길에는 그리움처럼 진달래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으리라.
<약력>
ㆍ『한국수필』(1994) 수필, 『문학춘추』(2001) 평론 등단, 문학박사
ㆍ 한국문협 국제문학교류위원,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광주문협 평론분과위원장ㆍ부회장 역임, 전남문협 이사ㆍ수필분과위원장 역임 등
ㆍ『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2018)『비 오는 날의 행복』(2019) 외 8권
ㆍ 세종문학상, 수필문학상, 공무원문학상, 전남문학상, 국제PEN광주문학상,
올해의 작품상, 아시아서석문학상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