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및 평론

닮아가는 세월

김 한 호 2022. 1. 31. 15:55

닮아가는 세월

 

김 한 호

(문학박사ㆍ수필가ㆍ문학평론가)

 

어지럽다. 하늘이 돌고, 땅이 돌고, 내가 돌고 있다. 빙글빙글 도는 데다 뱃속이 울렁거리더니 토하고 말았다. 아침에 누워서 허리 굴리는 운동을 하다가 갑자기 어지럼증이 생겼다. 뇌출혈인 것 같아 아내가 119에 전화하니 코로나 방역복을 입은 구급대원들이 왔다. 이렇게 죽는가보다는 생각이 들어 유언을 했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두어 마디 말만 했다.

 

대학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응급실에서 MRI를 찍고 몇 가지 검사를 하더니 의사가 이석증이라고 했다. 이제까지 이석증으로 아픈 적은 없었다. 뇌출혈이 아니라니 죽을병은 아닌 것 같았지만 어지러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며칠 동안 어지러웠다.

 

어지럼증은 달팽이관과 반고리관에 문제가 있을 때 발생한다. 어지럼증은 멀미를 할 때도 나타나는데 흔들리거나 회전하는 물체를 탈 때 일어나는 병적인 반응이다. 어지럼증이 일어나면 얼굴이 창백해지고 메스껍고 구토가 나며 진땀이 난다. 이러한 어지러움 때문에 어머니와 우리 남매들은 평생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다.

 

어지럼증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우리 남매들은 어머니를 닮아 모두가 멀미를 심하게 한다. 어머니는 물레방앗간에서 설빔 쌀가루를 빻아가지고 징검다리를 건너오다 어지러워 쌀가루를 개울물에 쏟았다고 한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물레방아를 쳐다보고 있다가 어지럼증이 일어난 것이다. 어머니는 어지럼증으로 평생 고통스럽게 살다 일찍 돌아가셨다.

 

나는 차를 타거나 배나 비행기를 탈 때면 멀미를 한다. 멀미를 할 때마다 어지럽고 메스껍다. 그래서 가까운 거리는 차를 타지 않고 걸어다닌다. 학창시절에는 멀미 때문에 수학여행을 한 번도 가지 못했다. 평생 멀미 때문에 탈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래서 장거리 여행이나 외국 여행을 해야 할 때도 멀미 때문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여행을 갈 때마다 멀미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멀미가 심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다해 출발한다. 그렇지만 멀미는 내 생각대로 통제되지 않는다. 더욱이 멀미는 나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 일행들에게도 불편을 끼쳐서 미안했다. 그래서 정년퇴직을 하고 북유럽과 러시아를 다녀온 후엔 멀미가 역겨워 외국여행을 가지 않기로 작정했다.

 

공수특전사에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릴 때도 비행기 멀미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무더운 여름에 산악점프를 할 때면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수송기에서 우주복처럼 두툼한 산악복을 입고 헬멧을 쓴 채로 몇 시간씩 대기하다가 낙하지점으로 뛰어내리는 훈련은 지옥 같았다. 더구나 고소공포증이 있는지 낙하산이 높은 나무 위에 매달려 흔들릴 때에도 어지러웠다.

 

그뿐만 아니라 해상침투 훈련을 하면서 군함을 탈 때도 특수부대 장교가 해군 병사들이 보는 데서 멀미를 했다. 수학여행을 인솔하여 제주도에서 잠수함을 탈 때도 멀미를 하여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교장이 창피하게 구토를 했다. 어쩔 수 없는 신체 현상이지만 아무에게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나만의 고통이었다. 우리 주위에는 어지럼증보다 더 심한 병약한 몸이거나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얼마나 힘들게 살아갈까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어지럼증으로 고생하고 나면, 불현 듯 병약한 몸으로 살다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길을 가다가도 어지러워 쓰러지신 애처로운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난다. 무명저고리 옷고름엔 눈물 닦은 자국이 얼룩져 있었지만 어린 자식들이 울까 봐 애써 웃음 짓는 모습이 애달파 보였다.

나 또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나만의 고통을 세월 속에 묻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세월에 세월이 더할수록 웃음으로 눈물을 닦던 어머니처럼 닮아가는 세월이 무심하기만 하다.

 

2022년 2월 10일(목) <전남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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