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김 한 호
고향에 있었던 쌍사자 석등을 보려고 국립광주박물관을 찾아갔다. 예전엔 석등이 박물관 중앙홀에 있었으나 2층 전시관으로 옮겨져 있었다. 국보 103호인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은 9세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석등에 불을 밝히고 국난을 극복했던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이 어두운 전시관 한쪽에 있었다.
원래 쌍사자 석등은 광양시 옥룡면 중흥산성 안의 절에 보물 112호인 삼층 석탑과 함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중흥산성에서 승려들이 왜군과 치열하게 싸우다 전멸하고, 절은 불타 없어졌다가 1963년에 중흥사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쌍사자 석등은 한국에만 있는 세계적으로 독창적인 석조물이다. 사자는 불법을 수호하는 힘을 가졌다고 여겨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국보 석등은 5기가 있는데 화엄사, 부석사, 보림사 석등에는 쌍사자가 없다. 쌍사자 석등은 국보 5호인 보은 법주사와 국보 103호인 광양 중흥산성에만 있다.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은 높이 2.74m로 연꽃 받침돌 위에 기둥 대신 두 마리의 사자가 서로 맞댄 채 발돋움하고 서서 석등을 떠받치고 있는 모양은 누구라도 탐낼 만한 아름다운 걸작품이다.
그런데 1930년 옥룡보통학교 후원회에서는 학교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석등을 부산의 골동품상에게 팔기로 했다. 석등이 국보급 문화재라는 가치를 몰랐던 옥룡보통학교 후원회에서는 석등이 예상가보다 훨씬 많은 데다, 이 일이 위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매각하지 않았다. 이듬해 일본인 골동품상이 석등을 해체하여 밀반출하려다 주민에게 발각되어 옥룡면사무소에 보관했다.
이 석등을 1931년에 조선총독부가 광주에 있는 전라남도 도지사 공관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경복궁 자경전으로 옮겼다. 1937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가져갔다가, 1945년 광복이 되자 경무대로 옮겼다. 1961년 5.16 후 국립박물관이 있는 덕수궁으로 옮겼다가,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으로 이사를 가면서 옮겼다. 1986년 박물관이 옛 중앙청 건물로 이사를 갈 때 석등도 옮겼다가, 1978년 국립광주박물관이 신축 개관된 후에 국보급 문화재가 없는 이곳으로 1990년에 옮겨졌다.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은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 103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1200여 년 동안 중흥산성에서 불심으로 백성의 안녕을 지켜왔던 석등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에 의해 끌려나오게 되었다. 그동안 국보인 석등이 기구한 사연으로 아홉 번이나 옮겨 다니다 고향 가까운 광주박물관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은 국운의 흥망성쇠에 따라 석등의 불이 밝게 빛나거나 석등이 우는 영험이 있다고 전해져왔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해에도, 일제 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해에도 석등이 울었다고 한다. 옥룡면에서 살았던 선친은 석등이 일본인에게 끌려나가기 전날 밤에 석등이 울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외침과 민란이 많았던 내우외환의 역사 속에서 고단한 삶을 살았던 민초들은 그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석등에 불을 밝혔으리라. 더욱이 가파른 산에 토성을 쌓고 전란이 일어날 때마다 산성으로 피난 온 백성들은 석등에 불을 밝히고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빌었을 것이다. 쌍사자 석등이 임진왜란과 일제 침략으로 핍박받은 우리 조상들의 수난의 역사 같아서 애처롭기만 하다.
그런데 지난해 전라남도의회에서는 90년 동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의 반환 건의안을 채택했다. 모든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역사ㆍ문화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다. 국태민안을 바라는 고향민들은 쌍사자 석등이 광양으로 돌아와서 석등의 불빛이 밝게 빛나는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약력
ㆍ문학박사, 수필가, 문학평론가
ㆍ육군 대위 전역(ROTC 14기), 전 고등학교 교장(홍조 근정훈장)
ㆍ저서 : 한국현대수필작가 대표작선집 『하늘 메아리』외 10권, 『21세기 한국교육 희망을 말하다』(공저), 2021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최우수도서
ㆍ세종문학상(대한민국문학대전), 수필문학상, 공무원문학상, 전남문학상, 광주문학상, 국제PEN광주문학상, 올해의 작품상(광주문협), 아시아서석문학상 대상, 한민족문화예술대전 대상(서울특별시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