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및 평론

초록빛 추억

김 한 호 2024. 11. 15. 11:18

수필문학202411월호(통권 388)

 

 

초록빛 추억

 

김 한 호

 

추억은 그리움이다. 그립다는 것은 지난날이 아름답고 행복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고통스럽던 그 시절이 잊히지 않고 기억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 날의 기억은 세월이 흐를수록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되는 것만 같다.

 

고희를 지나니 기억 저편의 일들이 그리워 반추하듯 지난 일들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중 하나가 군대생활을 할 때 연인과 주고받은 편지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편지는 군사우편이라 그 당시 일들이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공수특전사에서의 일들을 회상해보고 싶었다.

 

 

그해 여름은 비가 내리지 않아 초목이 타들어가고 풀벌레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ROTC 소위로 임관한 나는 보병학교 교육을 마치고 공수특전사에 100여 명의 동기들과 함께 차출되어 공수훈련을 받느라 한 달 동안 지옥처럼 보냈다. 어찌나 더운지 쉬는 시간이면 소금을 한 주먹이나 먹었다. 열사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공수특전사는 한국군 최정예 부대로 적국의 후방지역에 침투하여 게릴리전을 벌이는 특수부대이다. 우리들은 공수훈련을 마치고 산속에 은거하며 특수전훈련을 받았다. 식량과 보급품은 낙하산으로 투하됐다. 깊은 산속에 투하된 보급품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중에는 가족이나 연인이 보낸 편지도 있었다.

 

사랑하는 그녀의 편지도 있었다. 낙하산으로 배달된 편지는 이 세상 어느 글보다도 아름다운 글이었다. 그녀는 검은 베레모를 쓴 나를 본 순간 대학생 때의 순수하고 낭만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시커멓게 탄 얼굴에 용감한 군인으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며칠 동안 잠 못 이루며 이 남자와 결혼을 해야 하느냐고 번민을 했다는 편지였다.

 

하늘에 펼쳐진 낙하산을 볼 때면 낙하산이 마치 하늘에 핀 꽃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막상 우리들이 점프를 할 때면 낙하산이 펴지지 않으면 죽는다는 공포감 때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낙하산이 활짝 펴지면 그 기쁨에 사랑하는 사람을 소리쳐 불렀다. 나는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늘에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면서 공허한 우주 공간에 메아리치도록 외친 언어가 사랑하는 그대의 이름이었노라고 고백했다.

 

이듬해 봄에 우리 부대는 독수리 훈련에 참가했다. 우리 중대의 공격 목표는 정읍에 있는 칠보수력발전소였다. 칠보수력발전소는 섬진강 물을 옥정호로 끌어올려 발전을 하는 국가중요시설이다. 우리 중대는 장교 2명과 부사관 10명으로 각자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공수부대는 적지에 낙하산을 타고 침투하는데 우리 지역대는 해상침투였다. 달빛도 없는 심야에 인천에서 군함을 타고 변산반도 앞바다에서 고무보트로 옮겨 탔다. 서해바다는 조류가 심해 노를 저어갈 수가 없었다. 소음이 나지만 모터를 작동하여 빠른 속도로 침투할 수밖에 없었다.

 

모터보트가 거센 물살을 헤치며 나갈 때 반짝이는 인광은 생전 처음 보는 신비한 불빛이었다. 해안선 가까이 다가가자 해안 초소에서 비치는 서치라이트 불빛은 우리 보트를 찾고 있었다. 우리들은 무사히 해변으로 상륙하여 산속에 은거했다.

 

특전식량으로 끼니를 때우며 야간행군을 하여 칠보수력발전소 가까운 산속에 비트를 치고 잠복했다. 나와 부사관은 경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칠보수력발전소 가까이 정찰을 나갔다. 산등성이 진지에는 방위병과 예비군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수풀 속에서 용변을 보던 초병이 우리를 발견하고 놀라서 도망갔다.

 

얼마 후 비상 사이렌이 울리며 모의 무장공비가 침투했다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공중에는 헬리콥터가 날고 산 아래에서는 대항군들이 포위해왔다. 부사관은 탈출하고 부중대장인 나는 포위되어 끝까지 대항해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

 

그날 밤중에 칠보수력발전소에서 폭파소리가 들렸다. 작전이 성공하자 눈물이 났다. 밤하늘에 떠 있는 그믐달을 보니 청소년 시절에 세상을 떠난 부모님이 떠올랐다. 부모님은 ᄃᆞᆯ하 노피곰 도ᄃᆞ샤 /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 어긔야 내 가ᄂᆞᆫᄃᆡ 졈그ᄅᆞᆯ셰라라고 고생하는 자식이 무사하기를 비는 것만 같았다.

 

우리 부대는 호남고속도로 비상활주로에서 수송기를 타고 도피 및 탈출을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계획이 바뀌어 정읍역에서 기차를 타고 간다고 했다. 섬마을 선생님인 그녀를 정읍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광주에서 기차를 타고 온 그녀와 14분 동안의 짧은 만남이었다. 헤어지는 아쉬움은 기적소리보다도 더 컸다. 플랫폼에서 손을 흔드는 그녀를 향해 특전용사들은 차장 밖으로 손을 흔들며 사랑하는 사람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으랴!

 

그녀와 사귄 지 7년 만에 결혼을 했다. 공수특전사 보병장교에서 전과를 하여 휴전선 비무장지대 정훈장교를 하던 무렵이었다. 그해 5월 휴가를 받아 처가가 있는 광주에 왔다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목격했다. 만약 그때까지 공수특전여단에 근무하고 있었더라면 군사 쿠데타에 휘말리어 고향 사람들과 피를 흘리며 싸웠을 것이 아닌가?

 

 

오늘도 ROTC 축제 때 만난 첫사랑의 여인이 편지를 쓸 때 사용하라고 선물로 준 초록 볼펜으로 글을 쓰고 있다. 군대에서 힘든 훈련을 받는 동안에도 그녀가 준 볼펜으로 편지를 썼다. 그녀는 정성을 다해 답장을 보내왔다. 그녀의 편지는 괴로움의 골짜기와 아픔의 벌판을 헤매다 지친 내 영혼을 위로해 주는 사랑의 메시지였다.

 

군대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주고받은 편지와 함께 그때 사용했던 볼펜을 모아두었다. 그 편지와 볼펜은 ROTC 초록 반지와 함께 푸른 군복 속에 묻힌 초록빛 추억이었다. 젊은 날의 애틋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지나간 날들이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지난날의 그리움은 사랑이었다. 세월이 흘러 황혼이 찾아오면 나와 그녀가 주고받은 사랑의 편지를 손주들과 함께 읽어볼 것이다. 그러면서 나라를 위해 군대에서 꽃다운 청춘을 바친 젊은 날에 꽃 피우고 열매 맺은 초록빛 세월을 추억하리라.

 

 

약력

 

육군 대위 전역, 문학박사, 전 고등학교 교장

세종문학상(대한민국문학대전), 한민족문화예술상 대상(서울특별시장상), 수필문학상, 공무원문학상, 전남문학상, 광주문학상, 국제PEN광주문학상, 올해의 작품상, 아시아서석문학상 대상

한국현대수필작가 대표작선집 하늘 메아리10, 21세기 한국교육 희망을 말하다(공저) 2021. 세종도서 학술부문 최우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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