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매일신문」 2024년 11월 28일(목)
마음의 뜨락
김 한 호
문학박사ㆍ수필가ㆍ문학평론가
도시의 아파트 생활에서 벗어나 뜨락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그동안 아파트에서 살다보니 자연의 아름다움과 삶의 여유를 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년퇴직을 한 후에는 경치 좋고 공기 맑은 전원에서 한가로이 꽃을 가꾸고 글을 쓰며 신선처럼 살고 싶었다.
그런데 아파트에는 뜨락이 없다. 아파트에는 베란다가 있지만 뜨락은 아니다. 뜨락은 집안에 있는 빈터로 마당이나 잔디가 있는 뜰을 말한다. 아파트에 뜨락이 없듯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생활에 여유가 없이 바쁘게 사는 것만 같다.
뜨락은 산수화의 여백과 같은 것이다. 산수화의 여백은 빈 공간이 아니라 무한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삶의 여유로움이다. 그래서 산수화 같이 숲이 우거지고 호수에 물안개가 피는 아름다운 자연을 사기 위해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도시 근교의 좋은 땅을 찾아 돌아다녔다. 하지만 내가 상상했던 산수화처럼 아름다운 자연은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마음에 드는 땅을 찾았다. 뒷산 숲이 울창하고 잔잔한 호수가 보이는 아늑한 곳이었다.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에 살면서 글을 쓰면 걸작이 써질 것 같았다. 그날 밤엔 혼자 기분이 들떠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 삶의 뜨락에 화려한 인생이 펼쳐질 것 같아 그 땅을 당장 계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계약을 하기 전에 부동산 서류를 살펴보니 중개인이 이야기한 것과는 달리 집을 지을 터가 아니었다. 더구나 도시생활에 길든 아내가 자기는 아파트에 살 테니 혼자 가서 잘 살라고 한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 팔자에 별천지에 살면서 불후의 명작을 창작한다는 것이 제 정신인지 혼란스러웠다.
조선시대 김천택은 “강산 좋은 경치를 힘센 이 다툴 양이면 / 내 힘과 내 분수로 어이하여 얻을 것인가 / 진실로 금할 이 없으므로 나도 두고 노니노라”고 했다. 공해와 스트레스에 찌든 현대인들이 쾌적한 자연 속에서 살고 싶어 하는 것은 누구나 같은 심정일 것이다. 그런다고 모두가 자연을 소유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우리가 자연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들에 핀 풀꽃처럼,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동식물과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야 한다.
원래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과 더불어 살다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초야에 묻혀 풍류를 즐기며 무위자연의 삶을 살았다. 이렇듯 우리 선인들은 자연을 통해서 인생의 지혜를 깨닫고 문화와 예술을 창조했다. 나 역시 아름다운 자연 속에 살면서 자연의 영감을 받아 감동적인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뜨락이 아름다운 집에서 창작 활동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작가는 영혼을 불태워 작품을 창작한다. 불후의 명작은 불우한 환경에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작가의 영혼이 깃든 결과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개성적인 예술품은 시공을 초월하여 인류에게 공감을 준다.
그런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며 여유자적하게 글을 쓰겠다는 것은 호사스러운 생각이다. 더구나 창작은 향락이 아닌 고난의 산물인데 여유를 즐기며 명작이 탄생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욕망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내가 원하는 삶과 내가 살고 있는 삶이 같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며 보람되게 사는 것이 행복이다. 나의 소망은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뜨락이 있는 집에서 불후의 명작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빌딩숲에 에워싸인 내 아파트 서재에서 도시의 공해와 소음에 시달리며 밤늦도록 글을 쓰고 있다. 비록 도시의 아파트일지라도 안분지족하며 졸작이라도 쓸 수 있다면 여기가 내 마음의 뜨락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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