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및 평론 124

하늘빛이 서러워

하늘빛이 서러워 김 한 호 아름다운 숲과 백사장으로 둘러싸인 소록도에 한센병 환자들은 보이지 않고 방문객들만 서성거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찾아가는 소록도 병원은 천형天刑의 문둥병 환자들이 사는 곳이라는 느낌보다는 조용한 공원 같았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시인의 라는 시를 읽으면서 어릴 때 고향 친구를 생각하며 울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해와 하늘을 보며 문둥이는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무슨 죄를 지었다고 하늘이 이런 몹쓸 병을 주었단 말인가? 문둥이는 서러워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으리라.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일이었을까? 어렴풋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문둥병에 걸린 친구 생각에 차마 소록도를 ..

수필 및 평론 2023.07.04

백비의 묵언

백비의 묵언 김 한 호 지난달 ROTC 14기 총동기회의 충청지역 문화탐방에 부부가 참여했다. 하루 일정으로 청남대, 계룡대, 대전 현충원을 탐방했다. 현충원의 호국영령들의 묘비에는 이름과 생몰연대, 업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우리들은 6ㆍ25전쟁 영웅 백선엽 대장과 이등병에서 장군이 된 우리 동기의 아버지 최갑석 소장의 장군묘를 참배했다.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다음날 진천에 사는 고향 친구를 만나서 고려시대 때 축조된 농다리와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는 보탑사를 찾아갔다. 보탑사에는 아무 글씨도 새겨져 있지 않은 백비(白碑)가 서 있었다. 보물 404호인 ‘진천 연곡리 석비’는 고려시대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3.6m의 용첩비로 받침은 거북 모양이며 비머리에는 아홉 마리의 용..

수필 및 평론 2023.06.29

잡초가 된 민들레

잡초가 된 민들레 김 한 호 예전에 교직에 있을 때의 일이다. 선생님이 학생을 ‘잡초’라고 꾸중했다고 자살을 했다. 말썽을 부리던 여학생을 지도하면서 선생님이 실언을 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잡초처럼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세상을 떠났다. 선생님도 학교를 떠났다. 노란 민들레가 피어 있는 교정에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고, 선생님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학생들이 울고 있었다. 새 아파트로 이사 온 후 조그만 빈터에 꽃밭을 만들었다. 수선화, 접시꽃, 달맞이꽃, 메리골드, 벌개미취 등 다양한 꽃을 심었다. 게다가 민들레 씨앗을 뿌렸더니 다른 꽃들 틈새에서 노오란 꽃들이 별처럼 피어났다. 북유럽을 여행할 때 노르웨이 옛 성터에 무더기로 피어 있는 서양민들레가 우리 아파트 작은 꽃밭에서 재현되는 듯 아름다웠..

수필 및 평론 2023.06.18

사각지대 사람들

사각지대 사람들 김 한 호 이웃에 사는 열두 살 소녀가 죽었다. 가난 때문에 치료도 제대로 못한 채 꺾인 풀꽃처럼 시들어버렸다. 소녀에게 콩팥을 기증하는 이도 없었고, 콩팥을 사서 수술할만한 형편도 아니었다. 신장병에 약초가 좋다는 소문만 믿고 달여 먹였더니 병세가 악화되어 밤새도록 부모를 보채다 세상을 떠났다. “엄마, 아빠! 내 병을 고쳐주면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잘하는 착한 어린이가 될게요.”라며, 하늘이 무너지도록 통곡하는 자식을 부둥켜안고 부모는 가난을 한탄했다고 한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처절한 삶의 절규였다. 부모가 죽으면 강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더니 부모에게 한을 남겼으리라. 인간의 생명은 빈부 귀천 없이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다. 생명이 소중한 까닭은 이 세상에 그..

수필 및 평론 2023.06.01

라일락꽃 피던 교정

라일락꽃 피던 교정 김 한 호 라일락은 첫사랑의 꽃이다. 라일락의 꽃말이 ‘첫사랑’이듯 나에게 ‘첫’이라는 말은 가슴 설레며 잊히지 않는 추억이다. 교직에 처음으로 발령을 받은 남녀공학 고등학교에는 봄날 이맘때쯤이면 라일락꽃 향기가 교정에 흩날렸다. 초임 학교에서 나는 풋풋한 학생들과 함께 젊은 날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우리들은 윤형주의 노래 ‘우리들의 이야기’를 즐겨 불렀다. “웃음 짓는 커다란 두 눈동자 긴 머리에 말 없는 웃음이 라일락꽃 향기 흩날리는 교정에서 우리는 만났소.” 나는 육군 대위 때, 라일락꽃 피던 교정에서 만난 첫사랑의 여대생이 시골학교 선생님일 때 결혼을 했다. 그런데 또 라일락꽃이 화사하게 핀 교정에서 청순한 여고생들과 만났다. 그 소녀들은 나를 총각선생님인 줄 알고 날마다 ..

수필 및 평론 2023.05.07

도깨비가 살던 고향

도깨비가 살던 고향 김 한 호 (문학박사ㆍ수필가ㆍ문학평론가) 옛 사람들은 도깨비와 더불어 살았다. 그 당시에는 도깨비들이 참 많았다.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에는 어두운 밤이면 헛것들이 도깨비로 보였다. 도깨비는 사람이 죽은 뒤에 생기는 귀신과는 달리 사람의 모습이나 도깨비불로 나타난다. 대개 도깨비는 빗자루, 절굿공이, 도리깨 등 오래 쓰다 버린 일상용품이 변해서 된 것으로 동굴이나 오래된 폐가, 당산나무 속에 살며 밤에만 활동한다. 도깨비는 『월인석보月印釋譜』의 ‘돗가비니’에서 온 말로 ‘씨앗’이나 ‘불’을 의미하는 ‘돗’과 ‘애비’가 합쳐져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성인 남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도깨비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어 도깨비 방망이를 두드리면 돈과 보물이 쏟아진다. 그래서 도깨비..

수필 및 평론 2023.04.21

꽃향기에 술이 취하다

꽃향기에 술이 취하다 김 한 호 봄 뜨락에 달빛이 은은하다. 혼자 술을 마시다 달빛에 이끌려 술병을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정원이 아름다워 조경상을 두 번이나 받은 우리 아파트 화단에는 매화, 산수유, 목련 등 봄꽃들이 피어 화사하다. 새로 지은 무등산아이파크로 이사 오던 해에 분재에서 옮겨 심은 홍매화가 붉게 피어 향기롭다. 이백(李白)의 시 처럼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시니 봄꽃 향기에 술이 취한다. 중국 당나라 때 시인 이백은 마누라도 버리고 혼자 살면서 마음껏 술을 마시며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어느 날 달빛 아래 혼자 술을 마시다 물 위에 뜬 달을 잡으려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과연 주선(酒仙)의 경지에 이른 시선(詩仙)이었다. 담양의 가사문학관에는 선조 임금이 송강 정철에게 하사한 은배가 있다..

수필 및 평론 2023.02.28

웃는 얼굴이 행복하다

웃는 얼굴이 행복하다 김 한 호 한국 사람들은 잘 웃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이 잘 웃지 않는 것은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웃음이 헤픈 사람은 점잖지 못한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고 악어와 같다고 한다. 얼마나 얼굴 표정이 무뚝뚝하면 험상궂은 악어에 비유했을까? 얼굴은 ‘얼의 꼴’로 그 사람의 정신세계를 나타내는 내면의 거울이다. 또한 얼굴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자취와 더불어 건강 상태까지도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은 그 사람의 살아가는 이력서이다. 그래서 링컨은 “나이 마흔이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얼굴은 부모의 유전자를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성형 수술을 하지 않는 한 바꿀 수는 없다. 그렇지만 얼굴 표정은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

수필 및 평론 2023.02.28

<겨울나무와 떨겨>

김 한 호 하늘에 별똥별이 떨어지듯 나뭇잎이 떨어진다. 나무는 겨울이 오기 전에 떨켜를 만들어 스스로 잎을 떨어뜨린다.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인간도 낙엽과 같다. 늙으면 나뭇잎 떨어지듯 자연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날씨가 추워지면 사람들은 두꺼운 옷을 입는다. 야생동물들도 겨울나기를 위해 털갈이를 한다. 그러나 나무들은 옷을 벗듯이 잎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로 겨울맞이를 한다. 가을이면 나무는 밤과 낮의 길이와 온도 차이를 감지하여 단풍이 든다. 낙엽은 가장 늦게 돋은 잎이 먼저 떨어지고, 먼저 돋아난 잎이 가장 늦게 떨어진다. 단풍이 든 나무는 떨켜를 만들어 영하의 추위에 살아남기 위해 얼기 쉬운 잎을 떨어뜨린다. 떨켜는 잎자루와 가지가 붙은 곳에 생기는 세포층이다. 나무는 봄..

수필 및 평론 2023.01.31

메타 세콰이아 여인

메타 세콰이아 여인 김 한 호 20여 년 전, 어느 문예지에 등단작가 수필 심사위원을 할 무렵이었다. 몇몇 투고자의 작품과 함께 촌스런 이름을 가진 어느 여성의 수필이 내 이메일에 갇혀 있었다. 문예지 회장에게 전화를 하여 그녀의 수필은 등단시키기엔 미흡하다고 했더니 고쳐서라도 꼭 등단을 시켜달라고 했다. 얼굴도 모르는 여인에게 전화를 했다. 원고를 고쳐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순순히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다고 하면서 언제 찾아뵙겠다고 했다. 그녀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듬어 심사평과 함께 출판사에 보냈다. 첫눈이 내리던 어느 날, 퇴근 무렵에 내 직장에 그녀가 찾아왔다. 시골에서 광주까지 와서 이곳의 길을 몰라 택시를 타고 왔다고 했다. 메타 세콰이아 가로수길이 보이는 경치가 아름다운 찻집에..

수필 및 평론 2023.01.31